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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青海湖과 소금 호수 (茶卡盐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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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국복음선교회 댓글 0건 조회 357회 작성일 23-07-16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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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칭하이성은 중국 서중부에 위치한 성급 행정구역이다. 성 이름은 칭하이성에 위치한 중국 최대 호수인 칭하이 호(青海湖)에서 유래했다.

 

성도는 란저우와 가까운 동북방의 시닝이다.[2]

 

간쑤성(북동쪽), 신장 위구르 자치구(북서쪽), 티베트 자치구(남서쪽), 쓰촨성(남동쪽)과 접해 있다.

 

칭하이는 중국어 명칭이며 원래 이 지방은 티베트의 일부로 티베트어로는 암도 지역이고 암도 및 현 쓰촨성 서부인 캄, 그리고 현 티베트 자치구와 함께 티베트를 구성한다.

 

중국에서 강 길이 순위 1, 2위인 장강, 황하의 발원지가 모두 칭하이성에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대한민국의 태백시와 비슷하다.

 

중국에서 자치구를 제외하고 가장 넓은 성으로, 면적이 남한 면적의 7배가 넘는 721,000km2에 달한다.

 

반면 인구는 562만 명에 불과해 중국의 모든 성을 통틀어 가장 적다.[3]

 

인구의 54.5%가 한족이나, 티베트족(20.7%)과 후이족(16%), 몽골계인 투족(4%) 등 소수민족 인구 비중이 거의 한족과 비슷한 수준이다. 실제 행정구역도 2개 시와 6개 소수민족 자치주로 이루어져 있다. 6개 소수민족 자치주들은 성 면적의 97%를 차지하나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5.9%로 한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2개 시보다 적다. 반대로 성 면적의 3퍼센트 정도인 지급시 시닝시와 하이둥시의 인구구성은 한족이 우세하고 칭하이성 전체 한족의 80% 가까이가 두 지역에 거주 중이다.

 

칭하이 호를 기준으로 남쪽은 대체로 티베트인이 많고 북쪽은 한족이 많이 산다. 위수 티베트족 자치주와 궈러 티베트족 자치주, 황난 티베트족 자치주, 하이난 티베트족 자치주는 티베트족이 각각 97%92%, 66%, 63%로 티베트인이 많이 산다.

 

특산물로 야생 상태의 동충하초가 유명하다.

3. 역사

고대 한나라 때 정복을 통하여 한족이 들어왔다가, 강족, 토욕혼 등과 섞이게 되어 오히려 한족들이 강족과 동화되는 상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고대 한나라 때는 아직 따로 성리학이나 중국 불교 등으로 구분되는 한족 정체성이 발전하기 이전이라서, 변방의 한족들이 비한족들과 동화되는 경우가 흔하기는 했다. 5세기에는 토욕혼이 이 곳에 나라를 운영했다.

 

7세기에는 토번이 토욕혼을 점령한 이후부터 토번의 영토가 되었고 중세부터 근세까지는 티베트의 암도 지방이었다. 당군이 토번군에게 우세를 보였을 때는 하황 지대가 당에 넘어갔고, 안사의 난으로 당의 정예군이 반란 진압에 투입된 틈을 타, 토번이 다시 빼앗았다. 이후 선종 시기 장의조가 하서 일대를 비롯하여 하황 일대를 당에 바쳤으나, 장의조 사후 하서 일대가 회흘인들에게 넘어가고 하황 일대는 토번에 다시 빼앗겼다. 그 뒤 왕안석의 신법 하에 재정이 풍족해지자, 북송 시기 송군이 이 곳으로 영토를 더욱 확장하였다.[4][5] 그러나 정강의 변 이후 송나라가 남쪽으로 내려가자 서하와 금나라가 하황 일대를 동시 관할하였고, 몽골 제국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기 몽골군에 점령당한 이래 원의 땅이었으며, 원이 망한 뒤에는 오이라트의 일파 호쇼트 칸국이 장악하였다. 호쇼트 칸국이 준가르 칸국에 공격으로 예속되자 청나라 강희제 연간에 외몽골과 함께 준가르로부터 빼앗았다. 그땐 몽골어로 쾨케누르라고 불렸다.[6]

 

근세까지는 티베트인이 대부분이었으나, 근세 청나라가 준가르 칸국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팔기군들을 주둔시키고, 팔기군 기지에서 둔전을 경작할 농민들과 군수품을 납품하는 상인들이 중국 본토에서 대거 이주하면서 인구 구성이 변하였다. 특히 간쑤성에서 후이족들이 많이 이주해왔다. 달라이 라마가 직접 관할하던 티베트 지방과는 달리 청나라 시기 청해로 분할되었으며, 별개의 이번원이 설치되었다. 이번원이 폐지된 이후에는 중화민국 시대에 청해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통치하에 남아 성으로 강등되었다.

 

19291, 군벌 펑위샹의 주도로 간쑤성에서 떨어져나와 성립되었다. 군벌 쑨롄중이 초대 성정부 주석을 맡았으며 1차 장풍전쟁 중 마씨군벌 마치(1869)가 정부주서에 임명되어 청해성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오늘날의 간쑤성 일대의 회족 상당수가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칭하이성은 1931년 마치가 사망할 때까지 마치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으며 마치가 사망한 후 마씨 군벌들이 돌아가면서 지배했다.

 

티베트는 티베트인들이 많이 사는 이 지역을 자신들의 고유 영토로 생각하여 침공하였으나 마부팡이 지휘하는 회족 군대에게 패전하고 이 지역은 마씨 군벌의 영지(?)화 되었다.

 

1938, 마치의 아들 마부팡이 장제스로부터 성정부 주석에 임명되면서 청해성의 지배자가 되었다. 1949,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이 무너질 때까지 마부팡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소수민족지역이기는 하지만 주변의 티베트나 위구르와는 달리 독립운동은 거의 없다.


[창하이성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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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아니라 호수인 青海湖,동양의 우유니라고 불리는 엄청난 크기의 소금 호수茶卡盐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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