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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날리기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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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국복음선교회 댓글 0건 조회 212회 작성일 23-05-1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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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M.I2007-11-03 22:19:24 | 조회 : 4920
제      목 연날리기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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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鳶)은 중국어로는 [풍쟁/風箏:fengzheng]이라 하는데, 옛날에는 [비연/飛鳶]이라 하였다.  역사상 가장 이른 연이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목연(木鳶)이라고도 하였다.  
목연의 발명자는 유명한 공수반(公輸般)이다. 공수반은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반(般)"과 "반(班)"은 음이 서로 같아서, 그를 "노반(魯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묵자>의 <노문(魯問)>편에 따르면, 노반은 대나무를 이용하여 나무까치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3일을 연속으로 날았다고 한다. <회남자>의 <제속(齊俗)>편에도 노반이 대나무로 "날으는 나무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이미 2천여년전인 춘추시대에 공중을 날으는 "목연(木鳶)" "목작(木鵲나무까치)"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이 만드는 기술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이러한 목연이나 목작을 만드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일 뿐만 아니라 쉽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한대(漢代)이전에는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진한(秦漢) 이후, 종이가 발명됨에 따라 종이연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서한(西漢) 초기,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이 출병하자, 장군 한신이 이 틈을 노려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이때  한신은 종이를 만든 연을 날려 미앙궁(未央宮)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고 땅굴을 파서 궁으로 침입을 기도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연은 "지연(紙鳶)"라고 부르는데, 남북조시대까지 줄곧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다,
당(唐)대에는, 연이 대단히 성행하였다.  이 시기의 연은 군사용 통신수단으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놀이도구가 되어, 연 제작의 기술도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당채(唐采)는 <지연부(紙鳶賦)>라는 문학작품에 연을 만드는 과정과 연을 날리는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이 시기에는 또한 등불을 단 연이나 소리를 내는 연 등등 형형색색의 연이 나타났다. 밤이 되면, 등불을 단 연은 하늘에서 별처럼 빛을 냈으며, 소리나는 연은, 대나무나 갈로 만든 작은 피리를 연 위에 부착하여 바람이 그 피리를 통과할 때 여러가지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졌다. 연에서 나는 소리는 사람들이 연주하는 악기(쟁/箏)소리처럼 들렸으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이 당시 종이로 만들었던 "지연(紙鳶)"은 지금의 "풍쟁(風箏:fengzheng)"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송대(宋代)의 연날리기는 이미 백성들의 놀이가 되었으며, 어린이들에게도 상당히 인기있는 놀이로 알려졌다. 이 시기에는 연날리기대회가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시합은 높게 날리기나 멀리 날리기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연줄 자르는 것-이른바 연싸움으로 승부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시합은 그 인기가 매우 높았는데, 송대의 황제들도 연날리기를 좋아하였다. 특히 휘종(徽宗)은 궁안에서 연을 날렸는데, 가끔 그가  날린 연이 평민들이 거주하는 성밖으로 날아가 떨어지곤 하였다.
연날리기가 사회 전체적으로 유행되자, 도시에는 전문적으로 연을 제작하거나 연실을 제작하는 수공업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임안(臨安)과 같은 곳에는 성안에 연이나 연줄을 파는 집들이 있었고, 또 전문적으로 연을 날리는 사람들도 출현하였는데, 이는 송대의 연날리기 발전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속박물지>라는 책의 내용에 따르면, "연날리기를 하면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리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몸안의 열을 발산하여 병을 없앨 수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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