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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홍은 떠돌이 약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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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국복음선교회 댓글 0건 조회 377회 작성일 23-05-1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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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황비홍은 떠돌이 약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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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비홍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영화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사진 하나도 남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에 관한 기록은 없다. 이 사진은 유일한 황비홍 사진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사진 속 인물은 그의 10번째 아들이란 주장이 더 유력하다. 그가 황비홍과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라 한다.

무술과 코메디를 접합해 코믹쿵푸라는 홍콩 영화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취권>에서 주연 성룡이 분한 인물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관객들은 성룡의 코믹 쿵푸에 정신이 팔려 정작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조차 신경을 안쓴다. <취권>에서 성룡과 <황비홍>에서의 이연걸이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취권>에서 정신없이 웃기는 사고뭉치 캐릭터가 <황비홍>에서 청나라말 들끓는 외세와 탐관오리에 맞서 싸우는 냉철하고 도덕적인 황비홍이라고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홍콩 무술영화의 단골손님 황비홍은 기네스북에 오른 인물이다. 무술의 고수로서가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인물로서이다. 황비홍이란 이름을 중국 전역에, 아니 세계 전역에 회자시킨 서극이 감독하고 이연걸이 주연한 1991년 <황비홍>은 99번째의 황비홍 영화로 카운팅된다. 그후 황비홍을 그린 영화와 텔레비전물은 중화권에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와 정확하게 몇 편이 되는지도 계산하기 힘들다.

수많은 영화로 제작될 만큼 중국 민중의 영웅으로 인기를 얻는 황비홍은 그러나 실존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공식적으로 검증된 바가 없는 인물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의 황비홍은 ‘실존 황비황’이 죽은 뒤 홍콩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 영화 속의 인물일 뿐이다.

외세가 침탈하던 19세 중반 중국 광동성 불산에서 태어난 황비홍은 무술의 고수이자, 중의학 명의로서 외세와 탐관오리와 싸우며 중국 민초들을 도운 인물이라는 것이 영화들이 그리는 황비홍의 일반적 모습이다. ‘보지림’(寶芝林)이란 의관, 즉 한의원을 세워 그곳에서 의술을 펼치는 한편 무예를 전파했다는 것도 황비홍 영화의 배경이다.

출생과 사망년도조차 불확실할 정도 황비홍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사실 전무해, 그의 일생은 나중에 홍콩으로 이주한 그의 무술 제자가 전하는 얘기에 근거한다. 황비홍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이연걸의 <황비홍>에서 영락없는 돼지 형상을 한 돼지고기 장수인 일명 ‘저육영’(渚肉榮)인 수제자 임세영  때문이다. 그가 뒷날 홍콩으로 건너와 완차이에 무술도장을 열고 <공자복호권>이란 책을 써 황비홍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을 전했다.

그렇다면 황비홍이 실제로 누구이며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영화에서의 존경받고 화려한 삶과는 달리 무척이나 고단한 삶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무술 시범으로 손님을 모으는 거리의 ‘약 장수’로 인생을 출발해, 말년에는 아들들도 먼저 죽고 자신은 질병으로 고생하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1847년 광동성 불산에서 중의사이자 무술사범인 황기영의 아들로 태어난 황비홍은 아버지의 생업을 그대로 이어받게 된다. 5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무술을 배운 그는 아버지를 따라 불산과 광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무술을 시범보이며 약을 팔았다. 떠돌이 약장사로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 황기영은 당시 광동십호(廣東十虎·광동의 열 호랑이)에 속하는 무술의 고수로 중국 쿵푸의 한 갈래인 홍권(洪拳)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성룡이 주연한 <80일간의 세계일주>의 마지막 장면에서 홍금보가 황비홍으로 출연해 광동십호를 이끌고 성룡의 세계일주 완성에 도움을 준다. 황비홍을 둘러싼 사실들이 영화에서는 편의적으로 짜깁기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아버지 황기영은 아들 황비홍에게 학문에 전념하라고 무술을 전수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는 무술을 아버지의 스승이자 광동십호의 한명인 육아채로부터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황비홍은 무술에 상당한 잠재력이 있어, 13살 때 이미 독자적으로 무술시범을 선보였다고 한다. 그의 무술기량이 본격적으로 점화된 것은 홍권의 정통 계승자라 할 수 있는 철교삼의 첫 제자인 임복성을 만나 철선권 등을 배워, 나중에 홍권의 대종사 반열에 오르게 된다. 16세 때 그는 무술도장을 열어 본격적으로 무술사범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나중에 의관 보지림을 열어 황비홍 영화의 무대를 만들게 된다.

황비홍이 영화에서 중국 민중의 영웅으로 부각되는 계기는 광동성 지역 군사조직에 무술사범으로 입문이다. 중국의 첫 개항지였던 광동 지역은 당시 밀려드는 외세의 각축장이자, 중국의 봉건적 모순이 집약적으로 표출되던 지역이었다. 태평천국의 난이 광동성에서 발원한 것에 드러나듯 광동 지역은 각종 민병 조직들이 난립했다.

그가 이런 민병 조직들과 관군에 관여한 것은 분명해 보이나, 정확하게 어떤 조직과 연관을 맺으며 활동했는지는 기록이 엇갈린다. 1870년대 초반 그의 나이 20대 후반부터 광주 수군의 무술교관으로 활약하며 그는 그후 각종 군사조직에 관여한다.

광동 지역 관군 5연대의 무술사범으로 활약하며 사령관인 오전미와 유대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1880년대 후반 오전미가 사망한 뒤에는 태평천국의 난에 가담했던 유영복이 조직했던 흑기군에 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흑기군은 베트남에서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청일전쟁 때에도 대만으로 파견되어 일본과 전투를 벌인다. 또 1890년대 후반에는 광동 지역으로 돌아와 의화단 사건 때 열강의 군대와 싸우고, 신해혁명 때에도 활약한다.

황비홍은 유영복 장군과 함께 대만까지 가서 전투를 치른 것으로 전해지나, 이를 전하는 기록은 전무하다. 황비홍의 흑기군 가담은 황비홍 전설의 핵심이다. 이연걸의 <황비홍> 1편 마지막 장면에서 유영복이 조정의 명령을 받고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에 황비홍에게 난징조약의 불평등 조약내용을 쓴 부채를 주며 조국을 걱정하는 마지막 장면이 나온다.

이는 시간대 순으로도 맞지 않는 사실이다. 황비홍이 유영복의 흑기군과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이나, 그가 본격적으로 흑기군의 간부로서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이연걸의 <황비홍> 시리즈는 이 흑기군을 둘러싼 사실을 편의적으로 짜깁기해, 황비홍의 전설을 극대화시킨다. 2편 남아당자강에서는 황비홍이 손문을 구하고, 3편 사왕쟁패에서는 황비홍이 러시아인의 이홍장 암살음모 와중에 이홍장도 만난다. 심지어 원화평이 감독한 <소걸아>에서는 황비홍이 아편전쟁에서 중국의 영웅인 임칙서를 도와 아편을 불태우기도 한다. 아편전쟁 때에 황비홍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실존 황비홍의 사회적 활동은 손문이 청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건설하는 신해혁명 즈음에 종료된 것으로 보인다. 중화민국이 건설되며 복건성에는 당시 복건성 순무였던 당경승을 새로운 지사로 임명하라는 폭동이 일어났으나 이홍장의 정부군에 진압당한다.

복건성의 군 총사령관으로 내정된 황비홍은 폭동의 실패로 광동으로 돌아와 50대 후반부터 보지림에 전념하며 불우한 생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말년에 황비홍은 보지림이 불타고, 아들들도 먼저 죽는 등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보지림은 정부군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전해지나, 확인된 바는 없다.

황비홍의 전설은 그의 사후 홍콩으로 이주한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이 나중에 홍콩 무술영화의 무술감독 등으로 일하며 황비홍의 전설을 만들어 낸 것이다. 홍콩에서 무술도장을 연 임세영이 길러낸 제자들이 홍콩 무술영화 제작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홍콩영화에서 무술감독의 원조인 유담이 50년대 홍콩 영화를 풍미했던 황비홍 영화시리즈의 무술감독을 했다. 그의 아들들인 유가량, 유가영도 영화배우와 감독으로 활약해 황비홍 영화뿐만 아니라 <독비도> <신타> <소림 36방> 등에서 배우와 감독으로 활약한다. 특히 <소림 36방>에서 삭발한 머리와 날카로운 눈매의 주연인 유가휘도 유씨 형제의 의형제이다.

1949년 호붕이 감독하고 관덕흥이 주연한 <황비홍전기>는 황비홍 전설의 시작이다. 호붕은 57편의 황비홍 영화를 만들었으며, 황비홍을 분한 관덕흥은 영화에서 황비홍의 호칭인 ‘황 사부’로 불릴 정도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황비홍은 홍콩에 한정된 대중문화이 주인공이었다. 그가 중국 전역, 세계로 이름을 내밀게 된 것은 서극이 1991년 감독한 <황비홍>이다. 해외 시장을 겨냥해 <옛날 옛적 중국에>(Once upon a Time in China)라는 원제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대륙의 젊은 배우 이연걸을 기용해 코믹 풍푸로 치닫던 홍콩 무술영화를 다시 정통 무술영화로 방향을 바꾼다.

서극의 영화는 황비홍을 중국의 정신을 지키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선각자적 모습으로 그려내며, 광동 지방의 인물에서 중국 전역의 영웅으로 확대시킨다. 또한 홍콩 반환을 앞둔 홍콩인들의 자존심을 표현한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황비홍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황비홍은 청조 이래 베이징의 중앙정부에 대항해 독자성을 지키는 한편 외세의 침탈에 가장 시달린 광동 지방 중국 민중들의 역사적 경험이 만들어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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